금오산 법성사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행하라.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사찰에 깃든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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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왜 거기에 사찰이

1. 사찰의 성립과 정신적 배경

사찰의 어원은 상가람마(Samgharama)이다.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비구(남자 승려), 비구니(여자 승려), 우바새(남자 신도), 우바이(여자 신도)으 사부대중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이 상가람마를 ‘승가람마’로 표기하였고, 그것을 다시 줄여 ‘가람’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번역하여 ‘중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처음 일어났던 서기전 6세기 무렵부터 승려들의 생활터전인 사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던 초기의 수행자, 그들은 원시경전에서 ‘집 없는 사람’, ‘삼림에 거주하는 사람’등으로 표현하였듯이 문자 그대로 출가와 유행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 밑이나 숲속, 석굴, 골짜기, 냇가, 묘지 등의 장소에 거주하면서 무일푼과 무소유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아 선정과 진리의 탐구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만 이러한 생활양식을 추구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고상한 수행자로 지목받았던 ‘사문’들의 한결같은 생활 태도였다.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인도 사상계에는 제사 만능주의로 타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만이 가장 신성한 신분이라고 내세우는 바라문(Branman)계급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문은 바라문들의 타락에 종교적인 회의를 느끼고 선정을 통한 신과의 교류와 생사의 해탈을 체험하기 위하여 피나는 고행을 닦았던 당시 인도의 종교 개혁가들이었다.

석가모니도 처음 출가하였을 때는 이들 사문의 일원이 되어 수행하였으며, 성불한 뒤 제자들에게 사문의 근본 생활양식인 ‘4의지’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4의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➀음식은 걸식으로 구할 뿐 직접 밥을 짓지 않으며, 신도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지 않는다.
➁옷은 남이 버린 베 조각을 모아서 만든 분소의를 입는다.
➂잠은 지붕 있는 곳에서 자지 아니하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 명상하는 수하좌를 원칙으로 삼는다.
➃약은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란 약을 사용한다.

이들 가운데 걸식과 분소의와 수하좌는 세속을 떠난 출가 수행자의 상징이었으므로,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이를 철두철미하게 준수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인 특성은 이와 같은 무소유의 생활에 많은 장애를 안겨 주었다. 인도의 여름은 4월부터 시작된다. 찌는 듯 한 태양열은 가뭄과 함께 만물을 시들게 하고, 그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또 다시 우기에 접어들면 푸르름을 되찾은 대지 위로 작은 벌레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기어 나온다. 그 벌레들이 문제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 벌레들이 많을 때는 길을 덮고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불살생을 제1의 근본 계율로 삼고 있는 승려들. 걸식과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옮기는 그들의 발걸음 아래에서 미물들이 죽어간다면, 그 수행을 올바르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폭우로 인하여 도로가 유실되는 경우, 수행자는 촌락까지 가지도 못한 채 탁발은 커녕 목숨을 잃어버릴 위험까지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우기인 3개월 동안, 탁발과 중생 교화를 위한 유행을 중단할 것을 계율로 정하고,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안거의 제도를 택하였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사찰은 건립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승려들 각자가 인연이 깊은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곳을 찾아가서 우기 동안 음식을 얻을 곳을 확보한 다음, 그 가까운 숲속 등에 거주하며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우기의 안거제도가 차츰 정립되면서 승려들은 부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모여 정진할 수 있기를 열망하게 되었고, 유력한 신도인 왕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음식물의 제공과 함께 불교 교단에 ‘원림’을 기증하여 승려들을 머무르게 하였다.

원림은 원래 ‘휴식처’나 ‘과일이 있는 동산’을 뜻한다. 인도의 여름 더위는 나무 그늘의 시원함만이 유일한 구원의 장소요 가장 적합한 수행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원림이야말로 안거를 위한 즐거운 동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 최초의 원림은 마가다(Magadha)국의 빔비사라 왕이 불교 교단에 기증한 ‘죽림원’이다. 처음에는 이 원림 안에 있는 나무 밑이나 자연 석굴에서 승려들이 거주하였으나, 한 부호가 비나 이슬을 피할 수 있도록 허술하나마 오두막 60채를 지어 기증하게 됨에 따라 죽림원에는 불교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정사는 사는 집이라는 뜻)’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뒤 정사는 차츰 격식을 갖춘 주거용 건축물로 바뀌어 갔고, 그 규모도 커져갔다. 죽림정사 이후 석가모니 당시의 최대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기원정사’가 건립된 것도 얼마 뒤의 일로서, 이 기원정사의 건립에는 수닷타(Sudatta)장자의 깊은 믿음이 어린 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른 아침, 죽림정사를 찾은 수닷타장자는 부처님께 예배하며 인사하였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기쁨과 근심을 여의어서 맑고 편안하게 빈 마음이 된자, 나고 꺼짐이 없는 도를 깨달아 열반의 경지에 이르른 자만이 길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나니라.“
부처님의 말을 들은 수닷타는 문득 마음이 맑아지면서 눈이 열리었고,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 불교 신도가 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청하였다.
“원하옵건데, 사위성에 오셔서 사람들을 제도하여 주소서.”
“그곳에 비구들을 수용할 절이 있겠느냐?”
수닷타는 부처님을 위하여 절을 세울 것을 다짐하고 사위성으로 돌아가 절을 지을 장소를 물색하다가, 기타(Jeta)태자가 소유하고 있는 동산을 선택하였다. 그 동산은 숲과 꽃과 샘과 못, 수석과 기이한 새와 짐승이 조화를 이루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장자는 태자에게 그 동산을 팔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팔 뜻이 없었다. 장자는 여러 번 청하였다. 기타태자는 성가심에 못 이겨 귀찮은 듯 지나가는 소리로 말하였다.
“만일 그 동산을 사려거든 금전으로 그 동산을 펴서 덮어 보라.”
그 말을 들은 장자는 이튿날 금전을 수레에 싣고 가서 그 동산을 덮었다. 이것을 본 태자는 놀랐다. 지나가는 농담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태자는 물었다.
“그처럼 금 한 치로 땅 한치를 사서 무엇하려 하는가?”
“일체종지를 성취한 부처님을 모실 절을 짓고자 하노라.”
기타태자는 크게 감격하여 그 동산을 내어 주었고, 수닷타장자는 그 동산에 크고 웅장한 절을 지었다. 이것이 곧 ‘기원정사’ 또는 ‘기수급 고독원’ 이라고 불리어지는 절이다.
기수급고독원이라 함은 기타태자의 숲인 ‘기수’에 수닷타의 한역 칭호인 ‘급고독(외로운 이를 돕는다는 뜻)’이 세운 사찰이라는 뜻이며, 기원정사는 ‘기타의 동산에 세운 정사’라는 뜻이다.
이 기원정사에는 석가모니가 체류하였던 향전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방을 가진 승당, 근행당, 화당, 경행당, 주방, 헛간, 변소 등의 각종 건물과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죽림정사와 기원정사 이외에도 동원록자모강당과 대림정사, 왕원정사, 온천정사등 유명한 사찰들이 석가모니 당시에 건립되었다.
‘정사’는 불교 교단의 공동 재산이었고, 안거 수행을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따라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찰은 정진을 위한 수행처로, 승려들의 공동 주거지로 정착되어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초기 교단의 생활 지침이 되었던 ‘4의지’는 차츰 사라져 갔다. 3개월의 안거가 끝난 뒤에도 비구들이 유행 생활로 돌아가지 않은 채 정사에 머무르는가 하면, 분소의를 입는 전통도 차츰 사라지게 되었고, 탁발보다는 정사에 앉아서 신도들이 주는 음식을 받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물론 모든 승려가 그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우기 이외에는 예전에 기거하던 나무 밑이나 바위 위에서 생활을 계속한 비구도 있었고, 사찰의 주거와 유행 생활을 겸한 비구도 있었지만, 비구들의 생활 형태는 유행 편력의 생활에서 정사 거주의 생활로 변모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승려들의 사찰 거주 생활은 불교 교단을 후세에까지 존속시킬 수 있었던 최대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유행자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의 신흥 종교들 중에서 현대에까지 존속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오직, 같은 사물의 집단으로 출발하여 불교보다 약간 늦게 승원의 조직을 확립한 자이나 교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사찰의 건립은 그 나름대로 불교의 교단과 교법을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견고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도의 사찰은 단순한 수행처에서 종교 의례를 집행하는 성소로, 나약한 중생의 고난을 덮어주고 행복을 선사하는 기도처로 그 성격이 승화되어 갔다. 그리고 교세의 확장과 함께 사찰은 그 규모나 숫자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조형 예술품 등과 함께 불교 건축의 찬연한 전통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사찰에 얽힌 참 정신! 이와 같은 유래에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사찰이 단순한 승려의 생활 터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철저한 무소유의 생활을 위하여 ‘4의지’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제자들의 진정한 해탈을 위하여 무소유의 생활을 강요했던 것이다.

탁발과 분소의와 나무 아래에서의 좌선으로 인하여 그 육체는 고달프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정신적인 풍요는 더하였으리라. 빈한한 생활과 나무 아래의 정진, 무소유의 정신은 무명을 씻는 첩경이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깃든 무명과 번뇌의 티끌을 씻어내기 위하여 부처님은 사찰의 건립을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찰은 건립되었다. 미물의 살생마저도 막아야 한다는 철저한 불살생의 정신이 사찰의 창건을 허락 한 것이다. 철저한 불살생은 대자대비를 낳는다. 개인의 해탈보다는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사찰 건립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사찰을 찾고 사찰에 머무르는 이들은 이와 같은 정신적인 배경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또한, 기원정사의 건립에 얽힌 장자 수닷타의 신심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공덕과 구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처님과 불교의 진리가 좋아서, 그리고 참된 구도자들을 고향으로 모시고자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기원정사를 창건한 그 순수한 열의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

사찰은 정진의 도량이다. 그곳은 부처의 세계로 중생을 인도하는 곳이다. 무소유의 마음을 가꾸고 대자대비의 불꽃을 피우는, 중생을 살리는 도량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깨어나고 맑아져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참삶의 길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이 사찰을 연 본뜻이리라. 그것이 사찰을 있게끔 한 참뜻이리라....,

2. 寺와 절

인도에서 ‘상가람마’ 또는 ‘비하라’로 일컬어졌던 승려의 집단 수행처를 중국에서는 ‘사’, ‘사원’, ‘사찰’등으로 불렀다.
‘사’라는 호칭은 불교 전파 당시의 중국 관청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즉, 한나라 때에 인도승들은 처음 중국을 방문했고, 그들을 머물게 한 곳이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하고 기거하는 일을 관장했던 ‘홍로시’라는 관청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머무르는 곳을 ‘00사’라고 부르게 되었고, 승려들이 머무는 곳이 다양화됨에 따라 관청과 구별하기 위하여 ‘시’를 ‘사’라고 달리 부르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된 것은 후한의 명제 10년인 서기 67년이었다. 중인도의 승려인 가섭마와 축법란 등이 불상과 불경을 흰 말에 싣고 낙양으로 들어오자, 명제는 이를 크게 환영하고 낙양성의 서옹문 밖에 정사를 지어 ‘백마사’를 지어 그들을 머무르게 하였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이며, 그때부터 ‘사’라는 호칭은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는 사찰을 지칭할 때 ‘사원’이라고 많이 부르게 되었는데, 사원이라고 할 때의 ‘원’은 주위에 회랑이나 담장을 두른 집을 의미한다. 사찰의 범어인 상가람마는 승려들이 모였음을 뜻하는 상가와 거주 처를 뜻하는 아라마가 복합되어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와 같은 원래의 뜻을 살려 중국인들은 사찰을 ‘사원’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사찰의 주위에 회랑 또는 담장을 두르게 되자 동산 또는 울타리를 뜻하는 ‘원’을 담장을 두른 집을 의미하는 ‘원’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따라서 당나라 때에는 ‘사’와 ‘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산동 반도의 적산 촌에 있었던 신라인의 사찰 ‘법화원’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영향을 받은 ‘선림원’, ‘문수원’ 등의 사찰이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 이후에는 ‘사’를 ‘원’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즉, ‘사’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서, ‘원’은 사찰 속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산 속에 있는 작은 사찰이나 토굴을 ‘암’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어휘를 그대로 받아 들여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 소수림왕 5년(375)에 세운 이불란사와 초문사이다. 신라의 경우는 아도화상이 일선군에서 포교 활동을 하며 숨어 살았던 모례의 초가집을 들 수 있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의 순교를 빚어낸 천경림의 홍륜사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다소 신빙성 있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신라에 처음 불교가 전해질 때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에 숨어 살았는데, 그 ‘모례의 집’이 우리말로는 ‘털례의 집’이었고, 그 ‘털’이 ‘덜’로 바뀌었다가 다시 ‘절’로 되었다는 설이다. 또한 사찰에 와서는 절을 많이 하여야 하고,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승려들이 종교적인 심성을 일깨우기 위해 의미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사찰을 ‘데라’라고 한다. 이는 파리어 ‘테라(There)'에서 왔다는 설과 아도가 머문 “털례의 집”에서 연유되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설이 있다.

3. 사찰은 왜 산 속에 많은가?

평지가 많은 인도나 중국은 말말 나위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와 일본도 고대의 사찰은 주로 시가지의 중심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우리나라 사찰은 수행이나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사찰은 크게 평지가람형, 산지가람형, 석굴가람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발전되었다.

평지가람은 나라의 서울을 중심으로 넓은 사역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의 원당이나 국찰 등으로 많이 건립되었고, 동시에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산지가람은 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의 영향과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수도 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닌다. 석굴가람은 천연 또는 인공의 석굴에 건립하는 사찰로서, 주로 기도를 위한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이 석굴가람은 우리나라보다는 인도나 중국에 많았던 유형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평지가람이 산지가람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산지가람은 그 규모에 있어서 도저히 평지가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나라 대찰은 거의 산 속에 있고, 사찰이라고 하면 산 속에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 우리나라만 이렇게 산지가람이 많아지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산악신앙 때문이었다. 백두산을 시원으로 하여 전국토로 퍼져 갔던 한밝신앙, 그리고 나라를 세운 국조들은 죽어서 산신이 되어 이 국토를 영원토록 지키고 백성들을 돌볼 뿐 아니라, 국조를 낳은 성모는 모두가 산신이라고 믿었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기쁘고 궂은 일이 있을 때 산신을 찾아 기도하고 산신의 뜻에 운명을 맡겼었다. 이와 같은 산악신앙이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기에 불교의 참된 빛 또한 산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승들은 산봉우리마다에 불보살의 이름이나 불교의 지고한 사상을 응축시킨 용어들로 봉우리 이름을 지어 붙였으며, 그 산 속 모든 곳에 부처님이 머물러 있고 부처님이 숨 쉬고 계신 도량이라고 설파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산악신앙을 무리 없이 흡수하였다.
전국의 이름 있고 성스러운 산, 특히 경주의 남산, 금강산, 오대산 등에 있었던 많은 사찰들은 고유의 산악신앙을 기초로 하여 그 산들을 불보살이 머물러 있는 불교의 성지로 변화 발전시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창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실리적인 호국호법의 의지에서 산지가람이 많이 창건되었다. 즉, 왜구들의 침략과 관련하여 창건된 금정산 범어사, 토함산 석굴암 등의 사찰들,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등에 신라의 사찰을 건립한 것은 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으로 승화된 사상성의 발로하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승려들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도읍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그리고 전국의 주요산성 안에 승군들을 주둔시키기 위하여 많은 사찰을 지었던 것도 실리적인 호국의 의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불교의 초세속주의 경향 때문이었다. 세속의 명리나 행복보다는 ‘탈속과 해탈을 추구하라’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는 수행인들의 수도처로는, 그 어느 곳보다 한적한 산중이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는 신라 말의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학에 입각하여 제창하였다는 산천비보설의 영향력 때문이다. 산천비보란 나라 안에 있는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하여 국가의 기업을 튼튼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도선 국사의 설에 의하면,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땅에도 쇠약함과 왕성함, 순조로움과 어긋남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도선은 인체에 쑥을 놓아 뜸을 뜨듯이 절과 탑을 쑥으로 삼아 쇠약하거나 어긋남이 있는 곳에 뜸질을 하면 삼재가 가시고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을 세울 곳을 선정 하였었다. 이와 같은 산천비보설은 왕건에 의해서 깊이 신봉되어 고려시대 5백 년 동안 도선이 지정한 산에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사찰이라고 하면 산사를 연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 때문이었다. 1392년의 조선 개국에서부터 대한으로 국호를 고친 1897년까지의 불교는 한마디로 배척과 억압을 당한 수난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왜 불교가 산속으로 숨어야 했던가? 많은 억압책 가운데 몇 가지 예만 들어 보기로 하자.

태종 6년(1406)에는 전국의 사찰 가운데 242개만을 남겨 두고, 그 나머지를 폐사로 만들어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세종 6년(1424)에는 36개의 사찰만을 남겨 두었으며,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도성 안의 염불소와 비구니 사찰 23개를 모두 헐어버리고 전국 승려의 환속을 꾀하였으며, 연산군은 승려의 무조건적인 환속과 더불어 그들을 노비로 삼아 사냥을 할 때 데리고 가서 살생의 동조자인 몰이꾼으로 이용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억압은 개화기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에 동반한 유생들의 횡포 속에서 승려들은 맞아 죽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으며,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사찰은 유생들이 주연을 베푸는 장소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
결국 왕릉을 돌보거나 왕족의 원찰이 되었던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모두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엇게 되었던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승려들은 피나는 정진을 통하여 불도의 명맥을 이어왔고, 그것이 5백 년의 세월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사찰은 으레 산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지고 있다.
사찰은 불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쫓아 불도를 닦고 불법을 널리 전파하는 요람이다. 이것이 사찰의 본질이요, 작용이다.
따라서 그 이름은 상가람마, 정사, 가람, 사원, 절, 그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 위치가 산이거나 도시이거나 해변이거나 상관이 없다.
사찰은 중생의 번뇌와 업을 녹여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량이다. 그곳은 생불을 배출하는 도량일 뿐이다.
사찰에 사는 사람이나 사찰을 찾는 모든 사람들, 그들은 한결같이 그 본질을 되새기고 회복해 가지면서 그 곳을 찾고 그 속에 머물러야 하리라.